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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읽고

 

         이번학기에 가장 인상깊게 들은 주제가 니체의 영원 회귀였다. 과거 어느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반복되고 있고, 그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을 과연 당신은 삶을 긍정할 있으냐 물음을 던지는 영원 회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많은 대학생들이 스스로에게 묻는 지금 잘하고 있을까 대한 대답을 해준다. 따라서 해당 구절을 다시 읽고 부족하지만 짧게 나마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 해석해 보기로 하였다.

            

1.    공격적인 용기

 차라투스트라는 어디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위로 향하고 있다. 난쟁이가 위에 올라타게 된다. 그리고 뒤에서 속삭이며 차라투스트라를 무너트리려 한다.

 

, 차라투스트라여, 현자의 돌이여!” 그는 비웃듯이 마디 마디 속삭였다. “ 위를 향해 몸을 높이 투척했지. 위로 던져진 돌은 어김없이 도로 떨어지기 마련이거늘!”[1]

 

 난쟁이가 하고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추측건대 높이 던져버린 돌처럼 다시 떨어지는 것이 인생이며 차라투스트라가 힘겹게 한발을 떼는 것을 중력의 악령 그는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다시 힘든 고비를 넘겨야 텐데 그렇게 힘을 들여 걷느냐는 의문과 조롱이 담긴 말을 귀에서 속삭이자 차라투스트라는 난쟁이를 무시한 오르고 오르며 고통스러워 한다. ‘꿈을 꾸기도 하고 생각에 잠겨 보기도하며 현재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에서 도망가 보기도 하였지만 버릴 없는 고통에서 그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용기, 그것이야 말로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야 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진군의 나팔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 용기는 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공격적인 용기는.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까지 죽인다.[2]

 

 자신의 내면의 공격적인 용기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차라투스트라는 난쟁이에게 자신은 공격적인 용기로 모든 것을 해쳐낼 있음을 말한다. 그것 하나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온갖 낙담들을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갈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공격적인 용기 긍정의 파토스를 의미한다. 힘겨운 일이 닥쳤을그래 와라!’라고 외치며 현실을 긍정과 함께 정면으로 맞이하는 긍정의 파토스는절대 해당하는관습, 신화, 도덕, 법칙 매여 현실에 끌려가는 현대인, 지금의 우리인 중력의 난쟁이 부정을 오히려 긍정으로 승화한다. 때문에 용기는 아무리 힘겨운 인생이더라도 기꺼이 다시 한번 맞이 있게 한다. 이는 이어 나오는 성문과 영원회귀에서 다시 엿볼 있다.

 

2.    성문과 영원회귀

 차라투스트라가 난쟁이에게 자신은 용기가 있다고, 너와는 다르다고 외치자 난쟁이는 차라투스트라의 등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자리에 성문 하나가 나타나게 된다.

    

     뒤로 있는 골목길. 길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저쪽 밖으로 있는 골목길. 거기에 다른 영원이 있다. 이들 길은 예서 맞부딪치고 있다.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 바로 성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위에 성문의 이름이 씌어 있구나. ‘순간이라는. ... 그러자 난쟁이는 경멸조로 중얼거렸다. “곧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하나같이 굽어 있으며 시간 자체도 일종의 둥근 고리다.”[3]

 

 갑자기 생겨난 성문은 순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느 순간 자신의 뒤로 영원이 흐르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은 것이다. 난쟁이에게 이렇게 영원히 굽은 길을 가야한다라고 하자 난쟁이는 원래 그런 것이라며, 자신이 믿는 진리도 굽어 있다며 차라투스트라를 경멸한다. 영원히 삶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 깨닫더라도 현대인인 난쟁이는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이며 자신이 어쩔 없는 도리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차라투스트라는 호통을 치며 사실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난쟁이에게 말한다.

 

여기 순간이라는 성문으로부터 길고 영원한 골목길 하나가 뒤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 하나의 영원히 놓여 있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달릴 아는 것이라면 이미 언젠가 골목길을 달렸을 것이 아닌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있는 일이라면 이미 일어났고, 행해졌고, 지나가버렸을 것이 아닌가? ... 그리고 달빛 속에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거미와 달빛 자체, 함께 속삭이며, 영원한 사물들에 대해 속삭이며 성문에 앉아 있는 나와 , 우리 모두는 이미 존재했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되돌아와 우리 앞에 있는 다른 골목길, 길고도 소름끼치는 골목길을 달려나가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 수밖에 없지 않은가?”[4]

 

차라투스트라는 인생을 살폈을 시작이 있었다면 끝이 있다고 믿었던 난쟁이와는 달리, 시작점이 어딘 , 끝점이 어딘 없는 인생의 순간이란 깨달았을 버틸 있느냐고 묻는다. 마치 끝이 존재한 마냥 끝만 향해 달리던 우리가 순간에 대해 이미 과거에 존재한 자였을 ,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놓여졌을 그리고 자리에 끝없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있는가? 소름끼치는 골목길 같은 지금 순간과 같은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과연 우리는 삶을 긍정할 있는가? 앞서 말한 긍정의 파토스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라 단언할 있다. 또한 끝에 열리는 달콤한 열매만 보고 달려나간다면 만약 열매가 사실은 독버섯이란 깨달았을 과연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던 나날을 좌절하지 않고 버틸 있을까? 그리고 만약 지금 순간 죽는다면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일을 후회하지 않을 있을까?

때문에 우리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즐겁기 때문에 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끝에 다다랐을 있을 결과의 보상 때문인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결과만을 보고 과정을 달려왔을 과정 자체가 무너지거나 보상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에서 오는 좌절과 허무를 감당할 없을 것이다. 과정자체를 즐기는 것만이 지금 현재를 즐겁게, 무겁지 않게 살아갈 있는 니체적() 방법인 것이다. 과정에 임하는 자세 또한 이후 양치기의 비유에서 니체는 설명한다.

 

3.    양치기의 비유와 웃음

 

그런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누워있었으니! ... 일찍이 인간에서 그토록 많은 역겨움과 핏기 잃은 공포의 그림자를 일이 있던가? 그는 잠에 빠져 있었나? 뱀이 기어 들어가 목구멍을 것을 보니. ... “대가리를 물어뜯어라! 물어뜯어라!” 안에서 나의 전율 나의 증오, 나의 역겨움, 나의 연민, 내게 있는 좋고 나쁜것 모두가 목소리로 외쳐댄 것이다. ... 양치기는 내가 고함을 분부한 대로 물어뜯었다. 단숨에 물어뜯었다! 대가리를 멀리 뱉어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 이상 양치기나 여느 사람이 아닌, 변화한 ,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땅에 그와 같이 웃어본 자는 없었으리라! ... 그와 같은 웃음에 대한 동경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 어떻게 나의 삶을 견뎌낼 것인가! 지금 죽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5]

 

차라투스트라는 뱀에게 목구멍을 물린 양치기를 보게 된다. 뱀에게 목구멍을 물렸다는 상상만해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양치기에게 물어뜯으라 외치게 된다. 목을 물린 저항조차 쉽지 않은 상황은 마치 우리네 현실과 같으며 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온갖 역겨움, 증오, 연민, 좋고 나쁜 모든것들이 있는 현실을 물어 뜯기 위해 양치기가 선택한 것은 웃음이었다. 웃음으로 인해 시커먼 뱀을 뱉어내고는 빛으로 감싸인 자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영원회귀에 대하는 자세를 엿볼 있다. 아무리 버티기 힘든 상황에서도 니체의 어린아이적 웃음으로 상황을 가볍게 바꾸는 자세, 긍정의 파토스가 없다면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니체는 우리에게 오히려 되묻는다. 과연 우리는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살아갈 , 그리고 그러한 무거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다고 깨달았을 어떻게 사실을 맞이할 것인가? 웃음과 긍정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4.    영원회귀와 긍정의 한계에 대한 비판

 아무리 니체가 긍정을 강조한다 한들, 영원히 반복되는 삶에서 오는 권태 자체는 긍정할 있을까?

 

, 사람들이 영원히 되돌아오다니! 왜소한 사람이 영원히 되돌아오다니! 언젠가 나는 위대한 사람과 왜소한 사람이 맨몸으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서로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가장 위대한 자조차도 아직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더없이 위대한 자도 너무나 왜소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싫증이었다! 그리고 더없이 왜소한 자들의 영원한 되돌아옴! 이것이 모든 현존재에 대한 나의 싫증이었다! , 역겹다! 역겹다! 역겹다![6]

 

 왜소한 자신이 되돌아오는 것은 니체조차 역겨움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때의 역겨움은 자신이 부정하는 자기 자신이 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염증이고, 자체의 권태에 대한 니체의 언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찾아볼 없다.

 그렇다면 단조로운 공장 노동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고, 그것 자체를 즐길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반문할 있다. 과연 같은 일이 같은 순서로 끝없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지겨워 하지 않고 있을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런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그것을 긍정하나 부정하나 영원히 일어날 일인 것이다. 그럼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란 합리화와 무엇이 다른 인가. 과연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춤추며 웃는 어린아이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은 과연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우리가 과연 위버멘쉬 있는 것일까? 답을 없다.

 



[1]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책 세상. 프리드리히 니체 저, 정동호 옮김. 3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p 259.

[2] 같은 책. 3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p 260 - 261.

[3] 같은 책. 3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p 262

[4] 같은 책. 3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p 263.

[5] 같은 책. 3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p 264 - 265.

[6]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민음사. 프리드리히 니체 저, 장희창 옮김. 3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p 354 -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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